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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 된 ‘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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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57회 작성일 18-12-28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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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수없이 겪었던, 억울함에 가슴 터지는 경험들. 그중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건 여고시절의 일이다. 야간 자율학습 때 용케도 추상같은 감독 선생님의 눈을 피해 ‘땡땡이’를 치던 친구들이 매일 서넛은 나왔다. 미팅이 있어서, 야구가 시작돼서, 절대 놓칠 수 없는 TV 프로그램 때문에, 그냥 기분이 꿀꿀해서. 후환이 두려워 동참하지 않던 나를 부추긴 건 영화 <시네마천국> 개봉 소식이었다. 성공적인 탈출의 기쁨과 영화의 감동도 잠시. 이튿날 기다리고 있던 건 무단 이탈에 따른 기합이었다. 나를 포함해 적발된 사람은 전교에서 스무 명이 채 안됐다. 하필 그날따라 반별로 무단 이탈자 이름을 취합할 건 또 뭐람. 짜증부터 치밀어 올랐다. ‘다들 잘만 하던데 왜 재수없게 나만!!’ 하는 억울함이 사무쳐왔다. 물론 떳떳한 행동은 아니었음에도 부당한 일을 겪은 것 같아 원통했다. 이후에도 나는 무단 횡단, 쓰레기 투기, 신호 위반, 불법 유턴 등 무수한 범법행위를 했고 간간이 ‘재수없게’ 적발됐다. 그때마다 내면에서 먼저 치고 올라오는 건 반성이 아닌 억울함, 즉 억울함으로 포장된 방어기제였다.

사회생활을 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됐다. 그중엔 사회적 안전망의 사각지대서 고통받는, 무고한 피해자들도 꽤 있었지만 상당수는 “다들 하는데 왜 나만…”을 호소하는 이들이었다. 딱히 잘한 것도 없으면서 어느새 당당하고 억울한 피해자가 된 그들이 내세우는 건 “왜 나만…”이다. 전문용어로 ‘관행’이다.

‘관행’. 사전에서 찾아보면 오래전부터 해오는 대로 하거나 관례에 따라서 하는 행위를 말한다. 긍정이나 부정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은, 가치중립적 단어다. 그러나 이 말은 특정한 단어들과 조응하며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활용된다. ‘관행이란 이름으로 자행돼온’ ‘~하는 관행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는 장삼이사뿐 아니라 인격을 모독하고 성차별과 폭력적 언행을 일삼는 직장상사, 제자를 노예처럼 부리는 교수, 노동자를 착취하며 담합과 탈세를 능력으로 여기는 기업인, 남의 아이디어를 내것처럼 갖다 쓰는 문화예술계 인사, 리베이트와 성접대 같은 온갖 비리 속에서 서로의 뒷배를 봐주며 그들의 세계를 공고히 쌓아가는 기득권. 누구랄 것 없이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적발되면 ‘관행’이라는 변명과 답변으로 일관한다.


문제는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도처에서 벌어지는 행위가 그들만의 편의와 작은 이익을 취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을 향한 무차별적 갑질과 가공할 폭력의 요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가 내면화된 기득권층의 지배가 공고해지고 세습적 자본주의를 향해 달려가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숨어 있던 관행은 자랑스러운 특권이 된다.


그런 징후는 벌써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랑거리가 아닌 줄은 알고 쉬쉬하던 최소한의 눈치가 파렴치한 비수로 바뀌는 현장을 이미 수없이 목도하지 않았나. “아니 저걸 말이라고…” 하는 탄식을 내뱉으며 지켜봐야 했던 뉴스가 어디 한두 가지였나. 그 정점은 최근 몇 년 새 수면 위로 떠오른 여성혐오다. 소수 극우 남성 누리꾼들의 토악질 정도로 여겨졌던 이 현상은 광범하게 퍼졌다. 여성에 대한 오랜 성차별적 관습, 성을 권력으로 여기는 남성들의 무의식이 합쳐져 자리 잡은 관행이다. 지난 17일 강남역에서 벌어진 끔찍한 범죄는 이 같은 관행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이 사건을 두고 성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일탈일 뿐이라는 다수 남성들의 시각, 그러면서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라는 그들의 심리적 연대 앞에서 공포스러워진다.

지금 이 사회를 활보하는 괴물 같은 관행들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고 진화할까. 우린 어떻게 대처하고 헤쳐나가야 할까. 맥 놓고 있다간 고스란히 우리의 딸과 아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 된다.

출처 : 경향신문, 2016.05.20, 박경은 | 대중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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