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고 있는 공무원 깨울 싸움닭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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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18회 작성일 18-12-28 04:26본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지휘한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관료 사회의 상식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실 출입문에는 '인생은 힘들다. 바보에게는 더 힘들다'라는 문구가 영어로 붙어 있었다. 그 문을 드나들던 국·과장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 그는 협상을 위해 출국하는 한 과장에게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죽여버리겠다(I will kill you)"고 영어로 말했다. 그 말을 들었던 당사자는 "영어가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킬(kill)이라는 단어가 별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갑자기 들으니 엄청나게 당황이 되고 불쾌하더라"고 동료들에게 털어놓았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고교를 다니고 대학을 들어가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영어가 편했다. 한국어에 약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보고를 갔다가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했다"는 칭찬을 들었는데 나중에 "무슨 뜻이냐. 개같이 일했다는 뜻이냐"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홍익대 교수, 로펌 변호사, 세계무역기구(WTO) 법률 자문관 등을 지낸 그는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통상교섭본부의 2인자인 통상교섭조정관(1급)으로 전격 발탁됐고, 관료 세계에서 시행착오를 겪긴 했지만 1년 뒤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승진했다. 한국에 인맥이나 학맥이 없는 것이 약점이고, 강점이었다. 파격적인 발상과 행동력을 보였다. 그러니 관료 사회의 반감을 샀다. 지지자가 적지 않았지만, 비난하는 목소리도 컸다.
김현종(오른쪽) 통상교섭본부장과 피터 만델슨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이 2007년 5월 4일 서울 외교통상부 청사에서 한- EU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출범을 공식 선언하는 기자회견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어쨌든 싸움닭이었다. 미국과의 FTA 협상에서 한 수 접어주고 시작하는 일이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방한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경주에서 오찬을 할 때 일화도 유명하다. 미국 동부 명문 앤도버 고교를 나온 부시 대통령이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느냐"고 묻자 같은 지역 명문인 윌브램맨슨고교를 졸업한 그는 "대통령께서 나온 학교보다 더 좋은 고교를 나왔다"고 받아쳤다. 관료 사회에서 잔뼈가 굵었다면 미국 대통령 앞에서 미국식 조크로 맞대응하는 게 가능했을까?
우리 관료 사회는 내부에서는 끈끈하고, 외부에 대해서는 뻑뻑하다. 거기다 이리저리 뒤엉켜 있다. 고시 기수, 고교 동문, 대학 선후배, 동향, 친구의 친구, 그 친구의 친구든 뭐라도 인연이 있어야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 외부에서 민간 출신들이 일하기도, 자리를 잡기도 어렵다.
경제부총리가 장관을 겸하는 기획재정부는 지난 5년간 민간이 응모할 수 있는 개방형 직위에 총 24명을 임명했는데, 대학이나 기업에서 자리를 옮긴 민간 출신은 단 한 명도 없다. 22명은 기재부 출신이고, 2명은 고용노동부와 한국
은행에서 일했다. 기재부는 "경제정책 총괄 부서라는 업무 특성상 민간 출신이 일하기 쉽지 않다"고 설명하지만, 단 한 명도 없다는 건 어떻게 설명하건 영 궁색하다. 공직 사회의 문을 더 열어야 한다. 판에 박힌 듯한 관료들과는 생각도, 행동도 다른 이질적인 존재가 더 필요하다. 싸움닭이 있어야 관료제의 튼튼한 횃대 위에서 졸고 있는 관료들을 깨울 수 있다.
[출처: 조선일보, 2016.10.17 , 이진석 경제부 차장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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